Logo

 

김유정기념행사

김유정신인문학상

제목 제16회 김유정 소설문학상 수상작
작성자 문학촌 작성일 2010.09.27 조회수 3260

제16회 김유정 소설문학상 수상작 - 크로스 컷
크로스 컷 - 한숙현
2010년 09월 27일 (월) 한숙현
   


[1]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 새벽 3시경이면 생수를 사러오던 여자가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퇴근준비를 했다. 작업복을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점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계산대 앞에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양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여자는 평소와 같은 생수를 골랐지만 오늘은 낱개가 아닌 20개짜리 묶음이었다. 원래 편의점에서 배달은 안 해주는 거 아시죠? 점장이 여자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나 곧이어, 퇴근길에 좀 가져다 드리지? 하고 나에게 생수묶음을 맡겼다.

나는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슬쩍 쳐다본 여자의 옆모습이 왠지 서늘했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서 헛기침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34층. 이 오피스텔 지하 편의점에서 일한지는 꽤 되었지만 이곳까지 올라와본 적은 없었다. 배달도 처음이었다. 여자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두어 번 더 헛기침을 했다. 여자의 집 현관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내가 말했다. 여기 놓을까요? 그러나 여자는 말도 없이 슬리퍼를 벗고 집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나는 현관 안쪽에 생수 묶음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그때, 여자가 말했다. 거기서 하나만 좀 꺼내 주실래요? 아, 네. 나는 생수 묶음의 비닐 포장을 벗겨 하나를 꺼낸 다음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잠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알듯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여자의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 저, 그게, 하고 얼버무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 사이 여자는 양손의 붕대를 둘둘 풀어버리더니 커피 괜찮지요? 하며 부엌 쪽으로 갔다. 여자의 손가락들은 군데군데 멍이 들어있었고 전체적으로 부어 있었다. 그런데도 커피를 타는 데 별 지장이 없는지 동작 하나 하나에 거침이 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들어와서 좀 편히 앉으세요.

갈등이 일었다. 어차피 지금 고시원으로 가더라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앉았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운동화를 벗는데 나도 모르게 꼴깍, 침이 넘어갔다. 여자가 편히 앉으라고 했지만 마땅히 앉을 곳이 없었다. 가구라고는 커다란 책상과 침대뿐이었다. 나는 그냥 바닥에 앉았다. 여자가 타 온 커피는 향이 진했다.



[2] 목이 말라요. 펼쳐진 책 위에 엎드린 채 깜빡 잠이 들었던 영 케이 윌슨이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웬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윌슨이 깜짝 놀라 외쳤다. 누구세요? 여자는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있다 기어 나온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보였다. 윌슨의 물음을 무시하고 여자가 다시 말했다. 목이 말라요. 윌슨은 일단 옆에 있던 물병을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여자가 두 손으로 물병을 잡고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는지 윌슨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가 빈병을 돌려주며 말했다. 아직도 목이 말라요.

윌슨은 기가 막혔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자를 방에서 빨리 내보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마무리하기 위해 칩거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오는 배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 여자는 한눈에 봐도 여배우는 아니었다. 여자에게 나가라는 말을 영어로 해야 할지, 한국말로 해야 할지 윌슨은 잠시 고민했다. 스무 살까지 한국에서 살았기에 그는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완벽한 영어발음은 어떤 자리에서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했다. 윌슨은 최대한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도 지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목이 말라요. 물을 주세요. 순간, 위축된 것은 오히려 윌슨이었다. 여자의 말에는 진심이 서려있었다.

그럼 잠깐 기다려요, 물을 사다 줄게요. 윌슨이 한국어로 말한 뒤 방에서 나왔다. 지하 편의점으로 향했다.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숨이 멎을 것 같은 표정의 여자를 일단은 돕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았다. 고장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그는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점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분명 무언가에 잠시 홀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겨 있는 방 안에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나타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생생한 장면들은 무엇인지? 쿨럭쿨럭 물을 넘기던 여자의 목울대 움직임이나, 지금 그의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는 적어도 현실인 것 같았다.

누가 봐도 황당한 이야기들을 적절한 이미지의 충돌과 반복을 통해서 현실보다 더 강력한 ‘현실’로 바꾸어 놓는 것이 윌슨이 만든 영화의 특징이었다. 그는 재능이 있었고 이미 충분히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시나리오는 어딘가 꽉 막힌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했다. 미완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옮기고 뒤섞고 다시 배열하다보면 심지어 잠간씩 조는 동안에도 시나리오 안에서만 계속 머물렀다. 윌슨은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차피 물은 필요했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윌슨이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 그의 셔츠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처럼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미 속도가 붙은 다리 때문에 쉽게 멈출 수도 없었고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멈추면 층계참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또한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두세 계단씩 가볍게 건너뛰며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3] “이걸 좀 보세요.”

여자가 침대 밑으로 손을 쑥 집어넣더니 분홍색 플라스틱 대야 하나를 꺼냈다. 물이 말라붙은 자국과 먼지로 생긴 얼룩뿐인 평범한 대야였다. 도대체 뭐를 보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대야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자가 엉뚱하고 두서없는 말을 시작했다. 이 방에선 책상에 앉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답니다. 그러니까 일도 그만두고 쓸데없는 연락도 다 끊고, 제가 이사를 온 게 벌써 몇 달이더라. 집중이 정말 중요해요. 완전히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요. 책을 쓴다고 해서 꼭 이렇게 유난을 떨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포기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근데 한 남자가 있었어요.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빈 대야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왜 그렇잖아요, 뭐랄까, 책 좋아하세요?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꽃집에 들렸는데, 그러니까 그 날이 제 생일이어서 꽃이나 좀 살까하고, 그런데 거기 꽃집에서 금붕어도 팔더라고요. 돈이 모자라서 어항은 다음에 사기로 하고, 일단 요 손가락만 한 노란 물고기 두 마리를 샀어요.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로. 그렇잖아요. 혼자 맞는 서른네 번째 생일에, 괜히 우울해하거나 그런 거 정말 싫거든요.

여자는 쑥스럽다는 듯이 혼자 웃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이면서 더욱 빠르게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가 참을 수 없는 게 뭐냐면, 생일날 밤에 헤어졌던 남자가 갑자기 연락해서는 딱 한마디, 보고 싶다, 그러더군요. 꽤 늦은 시간이었죠. 그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그럼 지금 올래? 해버렸어요. 전화를 끊고 나니까, 갑자기 온다는데 집이 엉망이어서, 대충 지저분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넣고, 신발장에 침대 밑에 싱크대 수납장에 책상 서랍에 대충 쓱쓱 집어넣고, 그렇게 대충 치워놓고는 혹시 몰라서 편의점에 부리나케 달려가 마침 와인을 사면 와인 잔도 같이 주는 기획 상품이 있다기에 잔도 덤으로 두 개 받아오고, 또 촛불 몇 개 까지 켜 놓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남자는 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었어요. 아, 술 먹고 헛소리 한 거 가지고 내가 또 착각했구나. 나쁜 놈, 개자식, 혼자서 평소 안하던 욕을 막 해봐도 기분은 계속 나쁘고, 잠도 안 오고, 그런데 새벽 세 시였나? 네 시였나? 엉망으로 취한 그 사람이 왔어요. 생일 축하한다. 늦어서 아무것도 못 사왔다. 딱 그 두 마디, 그러더니 마치 헤어진 일 없었던 사람처럼 키스를 하더니 저를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어요.

여자는 남자와의 섹스를 굳이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많이 불편했다. 날은 이미 밝기 시작했고 여자가 타 준 커피도 식어있었다. 가까이서 본 여자 얼굴은 썩 예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봐줄만한 편이었다. 특히 흥분해서 말할 때면 입 모양이 묘하게 일그러지는 게 매력 있었다. 다만 말이 횡설수설하는 게 가장 큰 흠이었다.

“그런 날 아시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싶은 괜히 그런 날.”

나는 여자가 말하는 그런 날이 대체 어떤 날인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여자나 나나 한심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고시원에 돌아가야 몇 시간이나마 눈을 좀 붙일 수 있었다. 저녁 알바 전에 도서관에 가서 찾아야할 자료도 있었고, 그래야 공모전 마감에 맞춰 시나리오를 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목표라도 없으면 정말 평생 편의점 알바나 하다가 인생이 끝날 것 같아서 자꾸 조바심이 났다. 그나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말해야 그냥 알바생이 아니라 영화 공부하는 알바생 정도의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 그런 사소함은 의외로 많은 곳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전에 일하던 호프집 사장만 해도 그랬다. 자네 요즘은 어떤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나? 이번에 나온 그 영화 말이야 내 생각엔 이렇던데, 전공하는 자네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면서 나를 무슨 예비 감독쯤으로 대접해 주기도 했다. 솔직히 문화센터에서 3개월짜리 강좌를 들은 게 전부라 영화에 대해서는 나도 사장만큼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도 시나리오를 쓴다고 하면 어디 영화과라도 다녔던 학생쯤으로 봐주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정정을 하지 않았을 뿐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내가 되고 싶은 건 영화감독도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었다. 찍어온 필름을 자르고 섞고 이어 붙이는 편집기사가 되고 싶었다. 같은 필름을 가지고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완벽히 다른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점이 내 흥미를 끌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날 필요도 없으니 성격에도 잘 맞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막막했다. 나처럼 영화과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이라면 일단 어디 조수로라도 가서 경험을 쌓아야했다. 그러나 어디 조수로라도 일을 하려면 먼저 인맥이 필요했다. 시시한 공모전에라도 입상해야 영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막연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자꾸만 나에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매일 새벽 3시쯤 한 숨도 못 잔 얼굴로 생수를 사러오는 여자를 기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여자에 대한 내 관심은 그냥 단순한 호기심 정도였지, 이렇게 일방적인 여자의 이야기를 얌전히 들어 줄 만큼의 관심은 아니었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 여자가 어쩌면 정신이 좀 온전치 않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한 방에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 무서워졌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겁이 많은 나였다. 어떻게 하면 적당한 순간에 여자의 지루한 이야기를 끊고 이 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4] 무언가 이상했다. 윌슨이 한참을 뛰었는데도 아직 20층이었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20층, 20층, 20층만 반복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한참을 올라가도 21층, 21층, 21층이었다. 너는 완전히 길을 잃었다, 병신, 네가 자초한 일이야. 이런 소리들이 목울대에서 울컥울컥 넘어왔다. 윌슨은 숨을 헉헉거리며 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20층 아래로나 21층 위로는 갈 수 없다는 것이 불길한 암시처럼 느껴져서 당혹스러웠다.

일단 잠깐 앉아서 쉬자. 몇 분간의 생각할 시간만 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은 가빠진 호흡을 진정시키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자 자연스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9년 전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운이 좋은 젊은이 중 하나였다는 사실.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이 되는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찬찬히 떠올림으로써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는 내려갈 수도 올라갈 수도 없는 20층과 21층 사이의 계단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뿐이었다.

영 케이 윌슨은 계단에 앉아 9년 전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뚜렷한 직업도 능력도 가능성도 없는 가난한 동네의 스무살 젊은이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젖먹이 아들을 버리고 집을 나간 후 소식도 없던 생모가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 번의 이혼을 거쳐 중산층으로의 진입에 성공해 살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얼마 전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모의 마지막 남편인 이혼전문 변호사 미스터 윌슨이 마음씨 좋은 사람이라서 아내가 생전에 죄책감 반 자기연민 반으로 그리워하던 아들을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 그래서 한국의 심부름센터를 통해 그 아이를 찾아 나선 지 수 개월 만에 서울 외곽의 한 허름한 헌책방에서 책 먼지에 파묻혀 있던 그 아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 당시 그 아들은 늙고 병든 할머니와 한 방에 살면서 밤에는 할머니의 수발을 들고 낮에는 헌책방의 책을 정리하며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것도 미국 달러로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9년 전 스무 살의 김영진, 현재 스물아홉의 영 케이 윌슨에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 사건 뒤 윌슨은, 아니 당시 영진은 꿈을 자주 꾸었다. 이제 막 데워지기 시작한 빨간 담요 밑으로 군살 박힌 거칠고 시린 발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와 그를 담요 밖 윗목으로 자꾸만 밀어놓곤 하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보면 집안 어른들의 신세타령이 집안 곳곳을 수맥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 에미 그케 도망가뿌고, 그 애비 허구헌날 술 퍼먹고 사고치고 그다가 그케 허망하게 죽어뿌고, 그케 천지 고아된 자를 지금까지 누가 이케 키웠노, 누가 자를 이케 키워 이맨치로 사람 맹글었능가 함 생각을 해보라 말이다. 니들은 모린다, 이 속이 울메나 시커머케 탓뿐졌는지, 자 여 함 봐라, 여 함 보라 말이다. 그러면서 할머니나 큰고모는 가슴을 풀어헤치는 액션까지 보여주며 유산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삼촌들이나 숙모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럴 때면 영진은 억지로 잠든 척을 하면서 담요를 바짝 끌어당겨 몸에 돌돌돌 감고는 시린 등을 덮었다. 집안 어른들 중, 생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영진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진은 자신을 키워준 이 고마운 어른들 중에서 누구에게 가장 고마워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그에게 돈을 남기고 죽은 생모와 그녀의 남편인 미스터 윌슨뿐이었다.

영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고모들과 삼촌들은 물론이고, 몇 년째 누워 있던 할머니마저 갑자기 증세가 호전되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심지어 6학년 여름 성경학교 이후로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교회 목사마저 나타나 유산으로 받은 것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며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씀을 이어갔다.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는 목사의 머리 위로 파인애플 빛깔의 반달이 걸려있었다. 그 달빛을 가르며 꼬리 잘린 고양이 한마리가 훌쩍 훌쩍 담을 뛰어 넘는 광경을 홀로 지켜보던 영진은, 서서히 윌슨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5] 여자는 자신이 지독히도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라고 했다. 나는 지독히도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여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생수 배달을 왔고, ‘잠깐’ 시간 있느냐는 말에 우물쭈물하다가 벌써 두 시간은 족히 지났을 시간을 이렇게 앉아 있었다. 물론 여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혹시 오늘 이 여자랑 자게 되는 건 아닐까, 순간이나마 그런 상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오래 외로웠던 사람들은 일상의 사소함까지 성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법이었다. 특히 고시원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면 일종의 ‘관념’만 가지고도 자위를 할 수 있었다. 지식인들만 관념을 가지고 자위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감각적 자극 없이 그저 관념만을 붙들고도 쉽게 절정에 다다르곤 하는 나는 자위를 할 때면 습관처럼 항상 왼손을 사용했다. 때문에 나는 사정을 한 뒤엔 아마도 내가 관념좌파인가보다! 이런 엉뚱한 말을 지껄이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동안에도 여자의 이야기는 남자가 떠나던 순간을 묘사하는데 지루하게 머물러 있었다.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슬쩍슬쩍 졸고 있었다. 그런데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깜빡 잠이 들었던 것일까. 나는 졸지 않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자가 입을 꼭 다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기회였다. 나는 잽싸게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런데 바닥에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살짝 쥐가 난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우 현관 쪽으로 한걸음씩 옮기는데 여자가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목이 말라요.

나는 여자의 말을 못들은 척 무시하며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채로 엉거주춤 몇 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툭.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이런 젠장. 아까 꺼내주었던 생수병이 쓰러져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목이 말라요. 이번에는 좀 더 큰 목소리였다. 나는 굴러가던 생수병을 잡아 마개를 열고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그러면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얼른 자리에 앉으라고 다그치는 표정이었다. 팔만 뻗으면 현관 손잡이가 닿을 것 같았지만 나는 팔을 뻗지 못했다. 결국 여자 곁에 다시 앉았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요, 괜찮아요. 떠날 수도 있고, 다시 올수도 안 올수도 있고, 예고 없이 그렇게 오기도 하고 또 가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가 떠난 며칠 뒤부터 자꾸 갈증이 났어요. 점점 더 목이 마른 거예요. 이유는 모르죠. 자다가 목이 말라서 벌떡벌떡 깰 정도로 갈증이 심했어요. 목구멍 안에 무언가가 팔딱팔딱 거리는 게,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돗물을 갑자기 입에도 못 대겠더라고요. 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비린내, 생선 비린내 같은 게 났어요. 관리실에 항의를 하니까 와서 검사를 해보더니 멀쩡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지금 장난하시나 이렇게 냄새가 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저를 좀 미친 여자 보듯 빤히 보더라고요.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수돗물에서 시작해서 점점 다른 것도 비리고 역겨워 입에 댈 수 없었어요. 혹시 임신한 건 아닐까, 덜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임신하면 그렇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서. 그게 뱃속의 아이랑 산모랑 원하는 게 다르고 서로 안 맞으면 그런다던데, 끔찍하지 않아요? 내 속에 있는 나의 일부인데 나와 원하는 것도 다르고 심지어 나를 조종할 수도 있다는 거. 나 아닌 존재가 내 안에서 꼬물거리며 자란다는 거, 정말 무서운 일 아니에요? 그런데 임신이었다면 그대로 낳을 생각이었어요. 그냥 느낌이, 왠지 쌍둥이일 것 같아서, 둘이나 한꺼번에 죽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결과는 임신이 아니었어요. 다행이다 싶으면서 서운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등이 이상했어요.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아프다가 또 벌레가 스멀스멀 돌아다니는 느낌이다가, 점점 등이 뒤틀리고, 등에서 무언가 막 튀어나올 것처럼 아팠어요. 그래서 요가도 다녀보고 마사지도 받아봤는데 효과는 없더라고요. 등이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 한밤중에 미친 사람처럼 비상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기도 하고, 믿기지 않겠지만 한번은 죽으려고까지 했다니까요. 등이 아파서 자살한다는 게 쉽게 이해가 안가시겠죠. 하지만 정말이에요.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 분명히 있다는 느낌은 참 끔찍한 일이거든요.

 

 [6]스무 살의 영진은 또래보다 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영진은 이럴 때일수록 홀로 골방에 들어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것을 알았다. 물론 큰돈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유산을 당장 현금으로 받게 되더라도, 이 집안의 혈관 구석구석까지 켜켜이 쌓여있는 주름살을 고루고루 펼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아앉은 어른들의 등에서 그 의중을 읽으며 평생 살아왔던 영진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스무 살의 그 앞에 던져진 행운을 일곱이나 여덟 조각으로 잘라내어 고모들과 삼촌들에게 얼마씩 돌아간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들 그것이 부족했다고, 자신에게 제 몫이 덜 돌아왔다고, 서로 가깝다고 믿는 만큼 미워하고 싸우고 등을 돌려 앉으리라는 걸 영진은 알고 있었다.

영진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이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어머니를 많이 닮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핏덩이를 떼어놓고 집을 나가야했던 사연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알 길은 없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가 중산층으로의 진입에 성공한 어머니처럼 그도 이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모든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래서 영진은 심부름센터 직원이 알려준 주소로 정성들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말이다.

나는 아직 어리고 아는 것도 없다. 당장 돈을 받게 되더라도 어떻게 쓰고 관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무런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물론 어머니의 돈은 당장의 현실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내게 주려고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깊이 고민해 보았다.

어머니가 내게 진정으로 주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돈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만약 어머니가 내게 남긴 값진 무언가를 당신이 현금으로밖에 줄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굳이 받고 싶지 않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적당한 곳에 기부하도록 부탁하는 바이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진심은 이렇다. 어머니의 돈을 받아 당장의 현실을 조금 풍요롭게 하기 보다는, 무언가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거다. 당신이 이런 나의 결심을 도와준다면 무척 감사할 것이다. 어머니가 생전에 그렇게 원했던 것처럼, 당신이 이제라도 나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대학을 마칠 때까지만 도와준다면, 그 이후에는 내가 자립하여 살아가겠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새롭게 도전하고 싶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다. 나는 돈보다 더 값진 것을 깨닫게 해준 어머니와 당신에게 이미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

영진은 편지를 쓰면서 많이 놀랐다. 가난한 동네의 있으나마나한 청년인 그가 마음씨 좋은 미국 변호사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고, 또 자신에게 그런 편지를 쓸 용기가 있었다는 것에도 스스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편지를 부치고 난 뒤부터 영진은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정도로 불안해졌다. 몇 달씩 오지 않는 답장도 걱정이었지만 또 막상 답장이 와도 걱정이었다. 지금까지 그를 거두어주었던 친척들에게 갑작스런 미국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걱정이었고, 망하기 직전인 고모부의 헌책방과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할머니를 두고 마음 편히 미국으로 떠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 그를 불안에 떨게 한 것은, 만약 미스터 윌슨이 그를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편지대로 덜컥 기부를 해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미스터 윌슨으로부터 답장을 받기 전까지 영진은 매일 밤마다 가위에 눌렸다. 식욕부진, 신경쇠약, 일시적인 안면마비 증상까지 가볍게 앓았고, 결국 이런 불안과 스트레스는 그의 뒤통수에 50원짜리 동전 크기의 원형탈모증까지 생기게 할 정도였다.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헌책방 구석에서 읽었던 책속의 영웅들이었다. 위대해지기 위해서 누구나 시련이 필요했다는 것을 확인하면 영진은 행복했고, 그들이 자신의 선택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부분 불안했고 가끔씩만 설레던 기다림이었다. 지금 계단에 앉아 그때를 회상하는 영 케이 윌슨은 자신의 진심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스무 살 김영진의 진짜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7] “그러다가 오늘 새벽에, 제가 이걸 발견한 거예요.”

여자가 바닥에 놓인 분홍색 플라스틱 대야를 뚫어지게 내려 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자의 묘하게 일그러진 입술을 쳐다보다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편 것 같이 또렷한 인중과 수척해 보이는 뺨과 턱, 머리카락에 가려 보였다 말았다하는 귀를 따라 시선을 옮겨갔다. 여자의 작고 동그란 귀에서 목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손으로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잘 들어보세요. 그러니까 제 생일 날, 꽃집에 들려서 노란색 물고기 두 마리를 산 그 날, 집에 와서 일단 물고기들을 이 대야에 담아두었죠. 노란 몸에 까만 점 두 개가 박혀서 헤엄치는 모습이 예쁘고 신기해서 저녁 내내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온다니까, 나는 어항도 없이 물고기를 대야에 넣어 둔 게 좀 촌스럽고 궁상맞게 보일까봐 신경이 쓰였어요. 일단 대야를 침대 밑에 밀어 넣고는, 나중에 어항을 사다가 수초랑 구슬 같은 것을 넣어서 제대로 꾸며줄 생각이었죠.

두 손으로 대야를 움켜쥔 여자의 손가락들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에만 열중해 있었기에 내가 자신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관찰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특별히 예쁘다기보다는 오목조목 귀여운 얼굴이었다. 몸매도 괜찮았다. 얼굴은 좀 마른 편이었지만 크림색 브이넥 스웨터의 도드라진 가슴 선이 제법 봉긋했다. 게다가 여자의 피부는 우유를 잔뜩 넣은 반죽으로 구워낸 빵을 연상케 할 정도로 희고 부드러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자꾸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좀 차리려고 다시 여자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야 물고기가 거기 있었다는 걸 기억한 거예요. 정말이에요. 오늘 새벽에 갑자기 물고기 두 마리가 책상 위에서 헤엄치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나는 그게 굉장한 영감의 순간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마침 목이 너무 마르니 일단 물을 사러 편의점에 다녀온 다음 본격적으로 글을 좀 써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들이 책상에서 일어났는데도 계속 허공에서 움직여서, 손가락들이 나를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니 침대 밑이었어요. 손가락들이 나를 침대 밑으로 끌고 들어가 이걸 꺼내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 잘 보세요, 몇 달 만에 물고기 두 마리가 완전히 먼지로 변해버린 거라고요. 물고기들이 컴컴한 침대 아래서 물이 점점 줄어들면서 말라 죽고 있는 동안, 난 그 위에서 섹스를 하고, 싸우고, 밥을 먹고, 울고, 신경질 내고, 왜 내 곁에 머물지 않느냐고 따지고, 악을 쓰고, 그가 또 가버렸다고, 글이 안 써진다고, 혼자 34층부터 지하 2층까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뛰어다니면서 죽을 만큼 숨이 찰 때까지 뛰어도 보고, 수돗물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사람들을 불러서 난리를 치고, 또 목이 마르다, 등이 아프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물고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그 남자 때문이라고, 그 냄새 때문이라고, 글이 안 써지기 때문이라고, 나는 모든 걸 때려치우고 골방에 틀어박힐 정도의 재능은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남자가 나를 이용했다고, 억울해 죽겠다고, 여기서 뛰어내려 죽으려고 해도 방충망 때문에 쉽지 않다고, 창문은 반 밖에 안 열리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이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고 또 쓰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어요. 무엇보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어요. 또 손가락들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도 끔찍했어요. 그래서 화장실로 달려가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다음, 왼손을 문틈에 놓고 힘껏 열었다가 세게 닫았어요. 쾅! 이번에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오른손을 문틈에 놓은 다음, 있는 힘껏 어깨로 문을 밀었어요. 쾅! 손가락들이 토톡, 토도독, 토도도독 부러졌지요.

나는 정말이지 이상한 여자의 방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서울수록 점점 더 명치끝이 저리고 목이 메어왔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여자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자는 점점 더 목소리의 톤을 높여 말을 쏟아냈다.

나는 손이 필요해요. 진심이에요. 그래야 다시 쓸 수 있어요. 당신이 물을 가져다주었는데,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데, 당신에게 부탁을 하고 싶어요. 왠지 낯설지 않아요. 이렇게 시간 많이 뺏어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커피 한 잔 더 하시겠어요?



[8] 영진의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한 미스터 윌슨은, 몇 달 뒤 한국으로 초청장을 보내 영진을 미국으로 들어오게 한 다음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김영진은 그렇게 영 케이 윌슨이 되었다. 뉴욕에서 대학을 다니며 영화를 전공한 그는 몇몇 독립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고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9년 만이었다. 과거의 김영진이 다시 돌아왔다는 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영화감독 영 케이 윌슨으로만 살고 싶었다. 그가 이 오피스텔을 택한 이유는 29층 그의 방에서 내려다보는 사방의 풍경 속에 가난한 동네가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분간 이곳에 틀어박혀서 시나리오를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랬는데, 오늘 새벽 느닷없이 이상한 여자의 방문을 받았고, 그래서 여자의 부탁으로 물을 사러 편의점에 내려가다가 계단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영 케이 윌슨은 자신이 20층과 21층의 계단 사이에 갇혀 버린 것에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물을 달라고 했던 여자가 나타났던 것은 그가 잠깐 조는 동안 꾸었던 꿈일 수도 있었다. 윌슨은 다시 생각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너무나 생생하다. 여자가 나타났던 것은 꿈이 아니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상상을 현실로 바꾸고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의 교차편집으로 충돌하는 이미지들을 뒤섞고 이어붙이고 반복한다면 얼마든지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왜 계단에 갇혀버렸는지 알고 싶었지만, 또 언제까지 20층과 21층 사이의 계단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계단 끝의 출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닐까.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마침내 영진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공상은 기운이 빠져 할 수 없었다.

새벽의 편의점은 한가했다. 영진은 뒤통수 근처의 빈 공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동작이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의 원형 탈모증은 치료되지 않았다. 영진의 양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던 미스터 윌슨은 그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것이 어렵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당분간 인도나 미얀마로 긴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아내의 허망한 죽음뿐만 아니라 그 이후 벌어졌던 치열한 법정 싸움이 미스터 윌슨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적혀 있었다. 인생의 참의미에 대해 고민하던 미스터 윌슨은 당분간 불교 공부를 하면서 적당한 사원에서 수도승으로 살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 결심에는 영진의 편지도 한몫 했다면서, 영진의 편지를 읽고 그가 얼마나 깊이 감동했는지에 대해서 두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적고 있었다. 영진이 받기로 했었던 돈에 대한 설명 또한 잊지 않고 덧붙이고 있었다. 아내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 하려고 차에 뛰어든 것이라는 가해자 측 변호사와 보험회사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조사와 소송이 1년 이상 이어졌다는 것과, 결국 보상금과 보험금은 원래 예상했던 금액의 절반도 받지 못했다는 것과, 그 돈은 영진의 뜻대로 아프리카 빈곤퇴치 기금에 영진과 영진 생모 공동의 이름으로 기부했다는 것도 알려왔다. 봉투에는 재단에서 보내온 감사편지와 눈만 퀭한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사진도 몇 장 들어 있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불가에 귀의했는지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영진이 답장을 받았을 때 그는 막 스물한 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미스터 윌슨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집안 어른들에게 당연히 말하지 못했다. 고모부의 헌책방은 온 식구가 애타게 유산을 기다리던 첫 해를 넘기지 못하고 망해버렸고, 두 번째 해에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모인 온 식구가 보낸다던 돈을 보내지 않는 미스터 윌슨을 실컷 욕하며 슬픔을 달랬고, 세 번째 해에는 미국에서 오기로 한 돈이 있었다는 걸 모두들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각자 먹고사는 일로 바빠져 있었다. 영진은 자신이 왜 그따위 편지를 보내 결국 한 푼도 받지 못했는가 하는 자책이 들 때면, 한동안 정신을 놓을 때까지 술을 퍼마신 적도 있었다. 헌 책방이 망한 이후 고모네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더는 신세를 질 집마저 없었다. 그는 몇 년 째 고시원에서 장기투숙 중이다. 피씨방, 호프집, 대형 마트, 편의점 알바를 닥치는 대로 하다보면 24시간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커다란 시계 속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돈이 조금 모이면 영화 강좌를 듣기도 했고, 언젠가는 꼭 편집기사가 되겠다는 꿈도 있었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이었다. 영진 스스로도 편집기사가 된다는 것에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꿈이라도 없으면 팍팍한 매일을 버티기 힘들었다. 스물아홉의 그는 스무 살의 그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뚜렷한 직업도, 능력도, 가능성도 없는 젊은이다. 그는 이제 책 한 권 들쳐볼 겨를도 없이 피곤에 지쳐 꿈도 꾸지 않는 잠에 빠져들곤 했다.



[9] 여자는 내게 부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준 것도 모자라 또 부탁을 하겠다는 이 여자는 약간 뻔뻔한 사람이구나 싶었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여자를 혼자 두고 가자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환히 웃었다. 예뻤다. 나는 금방 마음이 약해져서, 여자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버렸다.

여자가 나를 자신의 거대한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느껴졌던 무언가 어색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상 때문이었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근사한 책상인데다, 구석도 아닌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 공간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건 아버지 책상이었죠. 자, 잘 들어보세요, 여자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들로 둘러싸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강간을 당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네?”

“모르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일종의, 알레고리죠.”

여자는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말고 마음이 바뀌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책상 의자를 쓱 빼서 옆으로 밀어 놓고는 내 손을 잡고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책상 아래 공간은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꽤 넓었다. 여자가 뒤로 돌아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옷을 벗더니 알몸이 되었다. 당혹스러웠다. 여자는 등을 보인채로 무릎을 꿇고 앉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여 엎드렸다. 여자의 희고 둥근 엉덩이가 바로 내 코앞에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앞으로 자위할 때마다 관념 따위는 붙들 필요조차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조용히 속삭였다.

“부탁이 있어요. 이걸 꼭 해 주셔야 제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어요.”

여자는 내 손을 가져가 자신의 등위에 얹었다.

“여기, 등 한가운데서 약간 오른쪽, 비스듬히 갈라진 상처 같은 게 있지 않나요?”

“글쎄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데요.”

“눈으로 볼 수 없으면 차라리 눈을 감고 더듬어 봐요.”

여자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그제야 미세하게 어떤 틈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여자는 그대로 엎드려서 고개만 돌린 채로 내게 말했다.

“이곳에 삽입 해줄 수 있겠어요?”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다리 사이만 내려다봐야했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기이해서인지 내 성기는 말린 과일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엎드려있어서 지금 내 처지를 알지 못했다. 여자도 긴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흥분이 되었는지, 등부터 발가락까지 바르르 떨고 있었다. 이대로 여자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여자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것 아닌가.

“한번 해볼게요.”

나는 합장하듯 손을 모았다.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운데 손가락부터 천천히, 여자의 등, 거기 비스듬히 갈라진 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여자는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아 터져 나오려는 신음소리를 막고 있었다. 가느다란 틈새가 서서히 내 손끝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사이 겹쳐진 손바닥이 물고기 두 마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파닥거리는 그것들은 여자의 등속으로 부드럽게 밀려들어갔다. 그제야 반응을 일으킨 성기가 벌떡 일어섰지만, 너무 늦은 일이었다.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어느덧 내 팔꿈치가, 좁혀진 가슴과 어깨가 그리고 숙여진 얼굴이 그대로 여자의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나머지 몸들도 순식간에 여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0] 영진은 지금 편의점 창고에 앉아 스무 살과 스물한 살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다. 그때 그냥 돈을 받았더라면 고모부의 헌책방은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았을 테고, 그도 좋은 대학에 다니고 그랬다면 어쩌면 지금보다는 좀 더 멋지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한 두 해를 더 버텼을지 몰라도 책방은 결국 망하고 말았을 테고, 대학을 졸업했어도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번듯한 취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진이 아는 사람 중에서 9년 전보다 더 가난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대학을 다녔건 부모를 잘 만났건 그보다 특별히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할 친구들이 몇이나 있던가. 영진은 지금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런 생각들을 휘휘 저어가며 졸음을 쫓았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와 과거와 현실이 되지 못한 생생한 미래의 장면들을 마구 자르고 섞고 붙여댔다. 매일 새벽 3시쯤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생수를 사가는 어딘가 좀 모자라 보이는 그런 여자를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이 지금껏 이십층과 이십일 층 사이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제법 자기성찰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이 오피스텔에는 34층까지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여기 사는 서른다섯이 넘은 사람들은 매일 새벽의 꿈속에서 도대체 어느 건물로 옮겨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기분에 피식 웃기도 하면서, 뒤통수 근처의 원형탈모증 자국을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만졌다. 그러면서 결국은 이번 공모전에 낼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쓰다 만 시나리오는 몇 있었지만 완성된 것은 아직 없었다. 영진이 습작노트를 꺼내어 어디에 삽입해야 좋을지 모를 장면 하나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매일 새벽 3시경이면 생수를 사러오던 여자가 오늘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퇴근준비를 했다. 작업복을 옷걸이에 걸고 있는데 점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계산대 앞에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양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