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김유정기념행사

김유정신인문학상

제목 2016 김유정신인문학상-단편소설 당선작
작성자 문학촌 작성일 2016.10.14 조회수 2336

[김유정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벡터 /추승현

 

 

 

 

 

 

 

 

 

 

 

 

 

 

 

 

 

 

 

 

 

 

 

 

 

 

오래된 한 비전(秘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거미줄에 촘촘히 맺힌 수많은 이슬방울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서로를 비추는 반영 속에서 우주는 무한히 증식한다.관념적이고 아득해서 구체적인 형상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나는 종종 거미줄에 걸린 우주라는 문장을 곱씹어보곤 한다.씨줄과 날줄 사이에 걸린,투명하고 차가운 물방울의 이미지를 그리다보면 오래된 영화의 오프닝이 떠오른다.지금은 세상에 없는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출연했던 영화로 그녀의 상대역인 남자배우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었다.그는 우주에서 지구의 어느 지점에 떨어진 바늘의 궤도를 그렸고,바늘이 특정 지점에 떨어지는 확률로 이루어진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다.그처럼 오프닝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영화는 다시없었다.


그 후로 틈날 때마다 나는 서점과 도서관을 드나들며 환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탐독했다.그리고는 나에게 전생의 기억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운명적으로 마주치게 될 전생의 인연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해보곤 했다.진부하지만 낭만적인 노래처럼 한 눈에 알아보는 그런 운명에 대한 상상은 수천 가지 갈래로 뻗어나갔다.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미묘하게 바뀌는 바람의 감촉,공기의 냄새,빛의 색채와 해질녘의 금성에 괜히 마음이 들뜨곤 하던 예민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그래서 정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우리의 인연이 오랜 시간동안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성격도 식성도 취미도 여러모로 달랐다.다르다는 사실이 얼마 동안은 상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혜성처럼 금세 지나가버릴 호감이었다.무엇보다 우리는 어렸고,봄바람과 하얀 벚꽃잎을 맞으며 손을 잡고 걷는 길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운명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어떤 광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그러니까,내가 정에 대해 가졌던 느낌은 그 정도였다.언젠가는 세월과 함께 지나가버리고 좋은 추억으로 남겠지만,막상 그렇게 되면 오래도록 슬플 것 같은 사람.그와 둘만 있을 때에도 내 마음의 밑바닥에는 늘 진공(眞空)이 존재했다.너무 지나치게 사랑해서 지나치게 슬퍼지는 일은 없을,딱 그 만큼만 사랑하도록 그것은 내게 끊임없이 속삭였으며 나는 그 마음의 소리에 충실했다.아직은 온 존재를 불살라버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그런데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래서였을까,우리의 관계는 심장을 델 정도로 달아오르지도 진저리칠 만큼 차가워지지도 않은 채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완만한 기복을 그리며 오래오래 이어졌다.우리는 나란히 어른이 되었고,그는 나에게 장미꽃과 향수와 키스를 선물했다.휴일에 우리는 종종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카페로 갔다.우리가 좋아했던 카페들은 분위기가 아늑한 대신 조명이 어둡고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눈이 아파왔다.그럴 때면 그는 노트북을 꺼내 게임을 했고 나는 따뜻한 모카를 마시며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문득 어떤 의문들이 마음을 두드렸다.나는 종종 그가 나에게 그러는 것처럼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다.그러면 그는 씩 웃으며 “네 생각”이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하거나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대꾸조차 없었는데,그래서 나는 진짜로 묻고 싶었던 그 뒤에 이어질 한 마디는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나는 굽이치고 꺾어지는 거친 시간의 계곡 그 어느 모서리에서 우리가 결국 잡은 손을 놓게 되는 그런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은 그와 진지하게 나눠보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늘 “왜 그런 걸 지금부터 걱정해야 하지?”라며 내 말을 일축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의 순간을 좀 더 충실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다시 게임 화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의 그런 태도는 지금의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추호의 의심이 없어보이기도 했고,우리 관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간의 에너지 소모를 요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우리의 관계에서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다.그것은 종종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렸고 안정을 위한 감정의 소모는 때로 나를 매우 지치게 만들었다.나에게는 휴식이 필요했고,점점 더 자주 그가 없는 나만의 세계로 틀어박혔다.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나의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그의 현실과 사고는 밭고랑처럼 가지런하고 정연했으며 논리와 증거들로 굳건히 떠받쳐진 세계였다.내가 보내는 형태 없는 신호들은 그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채 공기중으로 흩어졌다.하루에도 몇 번이나 두서없는 환상과 현실을 어지럽게 오가는 내게 그가 뿜어내는 안정감은 매력적이었지만,그의 세계가 견고해질수록 그와 나 사이에 놓인 공통분모의 영역이 점점 위태로워지는 느낌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강해져갔다.언제부턴가 그는 내 이야기의 끝에 늘 이렇게 덧붙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서,도대체 뭐가 문제야?”

평일 오후의 고속도로는 한산했다.정이 핸들을 잡은 흰색 세단은 낮게 내려앉은 초겨울의 회색 하늘 아래를 거침없이 달렸다.창문을 내리자 비 냄새를 품은 거친 바람이 굉음과 함께 들이닥쳐 머리칼을 헝클었다.나는 창문을 올리고 카오디오를 틀었다.클래식음악과 영어회화와 아이돌그룹의 노래가 단속적으로 지나갔다.개그듀오가 시청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채널에서 손을 멈추려는 찰나 그의 손이 내 손을 밀어내고 채널을 돌렸다.저리 비키라는 듯 다소 거칠고 힘이 실린 접촉이 이물스러워 나는 뜨끔한 가슴으로 손을 거두었지만 그는 전방에 시선을 못 박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모노톤의 풍경만큼이나 단조로운 남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공기를 진동시켰다.음량이 너무 커서 침묵이 한층 더 무겁고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온몸을 결박당한 듯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할 수 없었다.소리를 줄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이 팽팽한 침묵을 깨뜨려 어떤 국면을 불어들일지 겁이 났던 탓이다.불온한 공기 속에 건너다보이는 그의 얼굴은 새삼 낯설었다.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속에 그는 어떤 말들을 숨겨두고 있을까.그는 오늘 어쩌면,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날 불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십여 년 전 그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부드러운 피부를 가진 소년이었던 그는 상기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었다.우리,만날래?그러니까 사귀어…볼래?잘해줄게.그는 차마 내 얼굴을 마주보지 못했고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잘해줄게.
그때의 교복 입은 소년이 지금 옆에 있는 남자와 동일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그 때의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나는 그와 함께 건너온 시간들을 천천히 되돌이켜 본다.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가늠해보려고 애써본다.그러나 모든 것은 처음부터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오늘의 틀어짐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점찍을 만한,랜드마크처럼 선명하고 확고하게 우뚝 솟아있는 과오 따윈 없었다.내가 좋아하는 크림 파스타를 그는 싫어한다는 것,그가 좋아하는 호러 영화를 나는 보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 과오가 아니다.하지만 그런 사소한 어긋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의 앙금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불만과 몰이해의 탑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결국에는 한 줌의 감정조차 더는 받아들일 수 없게끔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라고,한 방울의 물로 인해 흘러넘쳐버린 물병처럼 되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다툼도 대단찮은 것이었다.친구들에게 그 일 때문에 정과 헤어졌다고 하면 왜?라고 되물을 것이다.별 일도 아닌데 왜?십 년이나 만났으면서.
글쎄 왜일까.나는 혼자서 답을 내본다.아마도 이젠 그의 무심함을 참아 넘기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겠지.

형님 부부와 저녁을 함께 한 것은 한 달 전 금요일이었다.정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남자는 그의 입사 선배로 두 살 연상이었는데,그가 갓 입사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이래저래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라고 했다.삼 년간 함께 일하면서 이젠 선배보다는 형님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고 말하며 정은 그들을 소개했다.형님이라는 남자는 인상좋게 웃으며 자그마한 아내의 등을 쓰다듬었다.대기업계열 증권회사의 대리인 남자와 초등학교 교사인 그의 아내.그들은 일 년차 신혼부부였고 아내는 임신중이었다.정말이지 보기좋게 평범한 부부였다.자리에 앉자 잔이 돌았고 형수 앞에는 사이다가 놓였다.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금요일이라 테이블은 거의 차 있었고 소란스러웠다.잔들이 가볍게 부딪혔다.
나로서는 그 자리가 달갑지 않았다.나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후 팬시용품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이 년 만에 웹툰 작가로 전업해서 만화를 그리고 있었고,정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증권사에서 근무 중이었다.자연히 우리는 각자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는데,그 상황은 내게 사람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와 상관없다는 깨달음을 주었다.내게는 정을 둘러싼 사람들과 나눌 말이 별로 없었다.그의 친구들 모임에 동행을 거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그런 나를 정은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친구들의 연인이나 와이프들의 다양한 직업과 출신을 들먹이며 말했다.“대체 너만 왜 그렇게 유별난 거야?내 생각 좀 해주면 안 돼?”손과 손을 마주잡을 수는 있을지언정,사람 사이에는 평생 건너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예외일 수 없다.
내가 별나게 예민하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맞는 얘기일 것이라고,나는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보면서 생각했다.정이 형수라고 부르는 그 여자는 잘 웃는 여자였다.남자들만의 이야기―회사의 이런저런 사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때에도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화제가 업황으로 넘어가자 가지고 있던 펀드를 추가로 매수하는 것이 좋을지 일년 만기 ELS상품에 새로 가입하는 게 좋을지 자문을 구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를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성격인지 매너인지는 모르겠으나 분위기를 잘 맞추는 사람임에 틀림없었고,정이 나에게 바라는 것도 저런 모습일 거라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부지불식간에 언짢은 기색을 비쳤던 것일까.형수가 불현듯 화제를 나에게로 돌렸다.“만화 그리신다면서요?만화가는 처음 봐요.신기해라.”그녀는 남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자기,기억나?우리 어렸을 땐,십대들 희망직업 일 순위가 만화가였잖아.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정말 좋겠어요.”
그녀 딴에는 대화에 나를 끼워넣으려는 배려였겠지만,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그녀는 곧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질문을 했다.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어요?네이버,아니면 다음?네이버 작가들이 돈을 그렇게 잘 번다면서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녀가 알고있는 웹툰 매체의 전부인 듯했다.그러나 광대한 네트워크의 세계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플랫폼이 존재했고,내가 작품을 게재하는 곳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내가 연재하는 사이트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조금 당황했고 작품에 대한 반응은 괜찮느냐고 물었다.“형편없죠 뭐.”라고 답한 것은 내가 아닌 정이었다.
“네이버에서도 인기 없으면 입에 풀칠하기 힘들다는데,무명사이트 작가들이야 오죽하겠어요.얘,미술 강사해서 먹고 살아요.학원 측에서 원하면 강의를 더 준다고 했는데도 마다하고 아직도 꿈꾸면서 이러고 살아요.어휴,빨리 정신 차려야지 언제 커서 시집오려나.”정은 하하 웃으며 내 볼을 잡아당겼고,여자가 감탄하며 말했다.“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경제력 많이 따지던데 두 분 다 대단하네요.그래도 젊을 때 많이 모아둬야 할 텐데,꿈도 좋지만 불안하지 않아요?이젠 어린 나이도 아닌데…난 절대로 그렇게는 못 살 거야.”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정의 손을 뿌리치고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이봐요.”술잔을 기울이던 남자들의 손과 여자의 웃음이 멈췄다.“취미로 그림이나 끄적거릴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요,내가?나 만화가라고 말씀드렸잖아요.유명하지 않고 돈을 많이 못 벌면 직업이 아니라고 누가 그러던가요?선생님 맞아요?”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여기서 멈춰야 한다고,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은 통제를 벗어나 속에 든 말을 쏟아냈다.“알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남의 수입에는 그만 신경 끄세요.본인 통장이나 걱정하시라구요!”

무례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웃어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그러나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화를 나는 참을 수 없었고 그것은 정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납득할 만한 숫자가 통장에 인쇄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 일을 비웃어온 그를 향한.그의 세계를 향한.그렇대도 그날의 불화는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그날 우리와 헤어지자마자 그들은 크게 싸웠다고 한다.거기에 대해서는 물론 나도 유감이었지만 정은 나의 사과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는 몇 번이고 자기와 형님의 돈독했던 관계를 들먹이며 나를 몰아세웠고 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기에 이렇다 할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미안함보다 서운한 감정이 더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길 복판에서 행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에게 고함을 치며 화를 내던 정은 결국 낯선 을지로 거리에 나를 버려둔 채 차에 올라 사라져버렸고,나는 스마트폰 지도 어플에 의지해 골목을 두어 바퀴 돌다가 발견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잡아탔다.머리를 창에 기대자 눈물이 흘러나왔다.모든 것이 명백히 내 잘못이라 하더라도,그 어떤 상황에서든 정이 내 편을 들어주었으면 했던 것이다.낯선 사람들이 아닌 내 편을.나는 창에 입김을 불어 불투명하게 만든 후 천천히 글자를 새겼다.
안녕
그리고 전화기를 꺼버린 채 혼자 주말을 보냈다.

빠앙――
길게 클랙슨을 울리며 검정색 그랜져 한 대가 불쑥 시야로 뛰어들었다.정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에 올려놓은 발에 힘을 주었고 그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급히 쏠렸다.
“개새끼가!”
정이 눈을 치켜뜨며 그랜져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검정색 차체는 곡예하듯 차선을 요리조리 바꾸며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추월해서 나아가고 있었다.멀리 서해대교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차들은 제 속도를 내고 있었으나 눈에 띄게 그 수가 많아져 있었고 하늘은 한층 어두운 색을 띠고 있었다.정은 신경질적으로 목을 조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단추 하나를 끌렀다.움직임을 따라 땀과 향수가 섞인 체취가 느껴졌다.미간에는 희미하게 내 천(川)자가 새겨져 있었고 얼굴빛이 어두웠다.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어야하나 싶었지만 새삼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을지로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한달 만에 만나는 자리였다.한 달이 되도록 문자나 전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이제까지 없던 일이었다.두 시간 전,타블렛의 빈 화면을 앞에 두고 선 하나도 긋지 못한 채 창 밖 풍경과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보고있을 때 정이 전화를 걸어왔다.일하는 시간일 텐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주변의 소음이 소란스러웠다.그는 한 시간 후 데리러 갈테니 준비하라고만 짧게 말했다.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올 것이 왔구나,그런 생각이 들었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음악을 듣고 싶었지만 정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성가셨다.그때 뉴스가 일기예보로 바뀌면서 경쾌한 목소리가 퍼져나왔다.기상캐스터는 세기의 우주쇼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그녀는 일만이천 년 만에 지구를 찾아온 혜성 러브조이가 오늘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통과할 예정이며,그 크기는 금성의 6배로 밤하늘에서 장관을 이룰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리고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한국에서는 기상악화로 관측이 힘들 전망이며 다음 관측 기회는 약 팔천 년 뒤라는 말도 덧붙였다.
번쩍,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그녀의 목소리가 일깨운 무언가를 더듬으며 나는 정을 돌아보았다.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바다에 가자고 한 것은 혹시 이것 때문이었을까.그러나 그는 때마침 울리는 메시지 알림음을 듣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라디오 채널을 돌려버렸다.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재즈풍의 선율을 타고 흘러나왔다.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더 이상 무슨 기대를 하는 걸까.그는 밤하늘을 좋아하던 그 소년이 아니다.여름과 겨울의 짧은 방학이 오면 천문대와 별자리 캠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빛나는 눈을 망원경에서 떼지 못하던 날들이 이제는 전생의 기억처럼 멀었다.
벡터가 뭐야?
어린 내가 그에게 묻는다.아직 젖살이 빠지지않아 불그레한 뺨이 연하고 통통했던 시절.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열여덟 번째 봄에 나는 중력을 벗어난 먼지처럼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마치 기계처럼 정해진 일과에 따라 먹고 자고 집과 학교를 오가는 생활은 진공 터널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나와 세상은 서로에게 무의미했고,나는 영원히 사랑하거나 사랑받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이방인처럼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이런 내가 자라서 무언가가 될 거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정은 검고 키가 크고 깡마른 소년이었다.새학기의 들뜬 분위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봄날,왜 천체관측부에 가입했냐는 질문을 받고는 친구따라 왔다고 대답하며 수줍은 듯 웃던 모습이 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고양이를 싫어하면서도 학교 뒷산의 길냥이들에게 곧잘 밥을 주었고 단체활동에서 소외된 아이에게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활동이 있는 날에 그는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의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는데,친구들의 이야기에 잘 끼어들지 못하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런 그가 불편했다.날씨,도시락반찬,이중인격자인 담임,친구가 기르는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들.미적지근한 나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셰에라자드처럼 이야기를 풀어냈고,그렇게 내 시간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어왔다.

“벡터가 뭐야?”
어느 날 내가 물었다.수업이 끝난 후 부활동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나란히 앉아있을 때였다.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남자아이들이 과학실에 구비된 도구들을 함부로 꺼내 장난을 치느라 부실 안은 소란스러웠다.정은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등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걸고 있었다.
“갑자기 벡터는 왜?”그는 정말로 뜬금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제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를 들었는데 제목이 벡터였어.노래가사는 그냥 연애이야기였는데 그 가사랑 벡터가 무슨 상관인가 싶어서…넌 이과잖아.”
“벡터는…음,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양?”그는 자신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니,그런 사전적인 정의는 나도 찾아봐서 알아.좀 알아듣게,그러니까,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양이 뭘까?노래 제목을 왜 그런 걸로 했을까.”
그는 “네가 말하는 건 이과랑은 별로 상관없는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부활동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나는 평소처럼 학교 아이들이 몰리는 교문 앞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다음 정류장을 향해 걸었는데,정이 나를 따라왔다.
“너희 집은 저기 반대쪽이잖아?”
“생각해봤는데,이런 거지.”
그는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을 보며 천천히 걸었고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걷는 속도를 조금 줄여야 했다.
“여기에 지구가 있어.”
그는 왼손을 들어 집게 손가락을 세웠다.
“그리고 여기에 어떤 별이 하나 있어.”
그는 오른손을 멀찍이 들어 엄지와 검지를 붙여 원을 만들었다.
“이 별은 우주공간에 둥둥 떠있을 뿐이었어.그저 존재하는 것에만 만족했지.그런데 어느 날 먼 우주에 있는 태양계의 한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돼.그것은 유리구슬처럼 아주 푸르고 아름답다고 모두가 말했어.이 별은 지구라는 행성이 너무나 보고싶어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어.혜성이 된 거지.이렇게 ,슈웅.”
오른손의 원이 왼손 집게손가락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손끝을 보다가 아이처럼 천진한 미소가 번지는 그의 옆모습을 살짝 곁눈질했다.
“여기서 이 별은 질량과 에너지를 보유한 단순한 물체인데 지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속도와 방향과 거리를 가지게 됐지?이게 벡터야.이걸 사람에게 대입해 보면 어떻게 될까?교복을 입은 어떤 못난이 여자애가 키 크고 멋진 나같은 사람에게 한 눈에 반해서 훅 끌려오는 그림이 상상이 가지 않아?”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고,그런 그를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무방비상태였던 나는 그를 몰래 훔쳐보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고,우리 사이의 공간을 메운 어둠에도 불구하고 한순간,그의 동공이 크게 열리는 것을 본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그는 잠시 길 잃은 두 손을 멈칫하더니 “딥 임펙트!”라고 말하며 왼손가락에 오른손의 원을 쿵 부딪치는 시늉을 했다.
“간다.”
그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차선 도로를 건너 반대편으로 사라졌다.나는 미처 움켜잡을 새도 없이 스러져버려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어둠에 삼켜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변화들은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시멘트로 지어진 단조로운 빛깔의 교사가 희미하게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그가 머무는 교실에서는 유독 투명하고 밝은 햇살이 넘쳐흘렀고 오래된 마루의 나무냄새는 왠지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이유 없이 심장이 뛰고 미열이 오르는 밤들이 찾아왔다.약품 냄새와 오래된 도구들이 자아내는 묵직한 공기 때문에 황량했던 과학실은 부활동이 있는 날이면 밤의 유원지처럼 기묘한 활기를 띠었다.그곳은 마치 내가 알던 익숙한 곳이 아닌 것 같았다.그것은 마법이었고,기적이었다.
나는 펜을 들어 빨라진 심장박동이 불러내는 이미지들을 그렸고 감상과 메모들을 덧붙였다.사소해보였던 한두 장의 스케치는 점차 방향성과 체계를 갖추어 나갔고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목표로 이어졌다.지금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너에게서 비롯된 꿈이,너를 멀어지게 하다니.

“주기가 일만 이천년이나 되는 혜성이 있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우리는 희끗한 눈발을 맞으며 나란히 걷고 있었다.혜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정이었다.
“십년 쯤 후에 지구와 가장 가까운 궤도를 지날 예정이래.지금도 광막한 공간 어딘가를 가로지르며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겠지.정말 굉장하지 않아?우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고,그것이 우리 세대를 지나서까지 이어질 거라는 것이.”
눈이 제법 쌓여 세상은 부드러운 흰 빛에 덮여있었고,걸음을 디딜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내가 그의 손을 잡자 그는 맞잡은 손을 자신의 푹신한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가느다란 눈송이가 그의 이마에,뺨에 내려앉았다.
“혜성이 오면 같이 별을 보러 가자.그때도 지금처럼 계속 함께 있자.”
그의 얼굴에 아이같은 미소가 번졌다.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십년이라는 시간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아름다운 청록색 혜성이 긴 꼬리를 끌고 가로지르는 밤하늘 아래,그때도 나는 그와 함께일까?
나는 정이 좋았다.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함께 어깨를 부딪혀가며 주말의 명동을 걷고,머리를 맞대고 공부하며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나가고,유명 여행지의 여행기들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어른이 되면 꼭 한번 가보자고 꿈을 나누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하지만,사랑이란 것은 그런 게 아니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를 아꼈지만,그것은 너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거나 젊은 치기로라도 영원을 맹세하고 싶은 감정과는 거리가 있었다.우리에겐 마지막까지 상대방에게 내어주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다.둘 다 이 점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고,두 세계 사이의 미묘한 거리를 더 이상 좁히거나 없애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우리는 오래지않아 열기가 사라지고 안정이 지배하는 무중력상태로 접어들었다.우리는 새로운 평화에 잘 적응해 나갔지만 나는 삶의 순간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의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정말 이대로 좋은 것인가?

그 후에 몇 번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를 지나칠 일이 있었다.그때마다 우리 학교가 저렇게 작고 낡았었나 하는 생각에 놀라곤 했다.그 시절의 빛은 온데간데 없고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교사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기억의 농간인지 세월의 영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 오래된 건물을 지날 때마다 나는 서글퍼졌다.내가 완전히 그 시절을 지나왔다는 것을 그로써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다.우리에겐 이제,다시 오지 않을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갉아먹으며 서서히 절망으로 빠져드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기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것을.나는 정에게 이것을 이해시키고 싶었다.우리에게 남은 감정은 사랑이 아닐 거라고.그러니까 우리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고.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유리에 빗방울이 듣고 있었다.한기가 스며들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히터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정이 한 발 빨랐다.그는 히터를 높이고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따뜻하게 좀 입고나오지.
그가 들릴 듯 말듯하게 중얼거렸다.내가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는데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옆 차선의 대형 화물차 한 대가 한껏 속도를 올려 우리를 지나쳐갔다.촤악 소리와 함께 정의 얼굴 너머 유리창이 흙탕물로 덮였다.
“도로가 아주 개판이구만.사고 나도 자기는 안 죽는다 이거지.”
정이 거칠게 클랙슨을 울리며 욕을 퍼부었다.평소에 험한 말을 쓰지 않던 그였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고작 한 달을 못 보았을 뿐인데 그새 낯선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피곤해 보여.”내가 말했다.
“놀랐어?”
나 역시 화물트럭이 스치듯 너무 가깝게 지나갔기 때문에 꽤 놀란 상태였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힘들면 일찍 들어가서 쉬지 무슨 일로 갑자기 불러낸 거야.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건데?너 원래는 일하고 있을 시간이잖아.”
“일단 도착하고 나서 얘기하자.네 말대로 피곤하기도 하고…이런 날은 나도 좀 긴장이 돼서.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는 앞 유리창에만 단단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높였는데도 시야가 좋지 않았다.물보라가 일었고,굵고 세찬 빗줄기가 요란하게 자동차 지붕을 두드렸다.못본 새 뺨이 움푹 패인 그의 얼굴이 한층 견고해 보였다.내가 무슨 말을 한대도 그의 굳은 얼굴을 뚫고 전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무력하게 시간을 견디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꽤 큰 후유증을 불러올 결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자 고슴도치마냥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그의 긴장감이 무겁게 전해져 와 불안하고 우울했다.그와의 이별을 수없이 머릿속으로 그렸었지만 그것이 꼭 오늘일 필요는 없었다.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휘둘려 갑작스럽게 마음의 동요를 겪어야 하는 일은 싫었다.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주변의 차들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폭우 속에서 용하다 싶을 만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앞 차의 운전석에서 머리를 내민 남자가 수건으로 백미러를 닦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말해.”
“뭐?”정이 재빨리 나를 일별했다.“나 지금 운전하잖아.노닥거릴 상황 아니라고.”
“천천히 얘기하면 되잖아.어디 가는진 몰라도 굳이 이럴 필요 있어?할 말이야 뻔한 거 아냐.다 알고 있으니 여기서 얘기하고 그냥 차 돌려.”
“뭐?내가 할 말이 뭔데.”
“헤어지자는 거잖아.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화를 내려고 했는데 눈물이 터져나왔다.영문모르게 서러운 마음이 복받쳐서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정이 오디오를 껐다.빗줄기가 차체를 강타하는 소리와 내가 울음을 삼키느라 히끅거리는 소리가 실내를 채웠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정이 말했다.“너는 왜 뭐만 하면 헤어지니 마니 그러는 거야?세컨드라도 숨겨놨어?”
“응?”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마냐.이젠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그만 좀 할 수 없어?어릴 때야 어리니까 그러려니 했지만…내가 너한테 그렇게 못 믿을 사람이야?”

딸꾹질이 나왔다.예상외의 반응이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럼 왜 한 달이나,끅,연락도 없이 팽개쳐 둔거야?한 번도 이런 적,히끅,없었잖아.”
“내가 분명히 지난달에,삼 주 동안 홍콩에 연수 다녀올 예정이라고 얘기를 했을 텐데…”
“…아.”

“설마했는데 진짜 잊고 있었구나.”
“나갔으면 나갔다고 톡이라도 보내주지.”
“뭐가 예쁘다고 굳이.”
“…미안.”
히끅
정은 한심하다는 눈길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 홍콩에서 오늘 왔어.공항에서 바로 너한테 온 거야.”
“왜?”나는 조금 기가 죽어서 대답했다.
“너도 아까 들었잖아.오늘 만 이천년 만에 혜성이 돌아오는 날이라고.이날이 오면 같이 보자고 했던 것도 잊고 있었지?날이 흐려서 보이진 않겠지만 예약한 것도 있고,너랑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니까.”
정이 속도를 조금 늦추자 옆 차선의 아반떼가 우리 앞으로 끼어들었다.
“혹시 형님네랑 있었던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 없어.그 다음날 술 한잔 사드리고 다 풀었으니까.형수님이 화가 좀 많이 난 것 같긴 한데…자기 마누라야 자기가 알아서 잘 하겠지 뭐.”
“너한테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잖아.”
“나한텐 너도 중요해.그리고 그 형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니야.”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기분 탓일까,그의 옆얼굴이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공기가 충분히 데워져 실내는 더웠고 긴장과 눈물과 딸꾹질이 지나간 후라 온 몸이 노곤했다.가벼운 열 때문에 얼굴이 불그레하게 달아올랐고 심장이 두근거렸다.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쉽게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말하자 그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누가 할 소릴 하고 있어.”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앞쪽에서 달리던 차량들의 대열이 흐트러지는 광경이었다.앞차의 뒤꽁무니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큼 다가왔고,몸이 크게 요동쳤다.

쿠웅―

둔중한 파열음에 이어 날카로운 경적 소리,타이어가 마찰하는 소리가 비의 장막을 뚫고 메아리쳤다.불협화음은 우리를 뒤따라오던 차량들에까지 돌림노래처럼 길게 이어졌다.우리가 타고 있던 차는 진행방향에서 오십 도쯤 돌아가 있었고 왼쪽 앞범퍼가 앞 차량의 뒷부분과 닿아 있었다.나는 이 모든 상황이 어리둥절해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눈앞의 광경이 현실이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괜찮아?”
정이 나를 거칠게 흔들었다.커브를 틀면서 문에 부딪친 탓에 그의 왼쪽 이마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공포로 마비됐던 감각은 서서히 돌아왔다.창백해진 정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쏟아졌다.
살았다.
다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하얗게 비어버린 머리를 맴도는 것은 오직 그 한 단어 뿐이었다.살아있어.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끌어안았다.울음이 멈추지 않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나는 그의 얼굴을,팔을,등을 힘주어 쓰다듬었다.정은 자신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며 내 등을 토닥였다.그의 체온은 여전히 따뜻했고,그래서 마음이 놓였다.잠시 후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세상의 소음이 다시 우리를 둘러쌌다.

사고는 서해대교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일어났다.스타렉스가 끼어들기를 시도하던 레이를 들이받으며 일어난 사고였다.길이 미끄러워 레이는 전복된 상태로 몇 미터나 밀려갔고,스타렉스 또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아 반파되었다고 한다.나는 소방차가 도착하자마자 손사래치는 정을 끌어당겨 구급대원에게 데려갔다.그는 경미한 타박상이라고 말하며 정의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 하나를 붙여주었다.크림색 레이에는 초로의 부부가 타고 있었는데,구급대원들이 운전석에서 빼낸 남자는 흐트러진 매무새에 이미 선혈이 낭자했다.그의 부인은 섧게 울며 자신을 들것에 누이려는 구급대원의 팔을 뿌리치고 다리를 절룩이며 남편이 누운 간이침대를 따라가고 있었다.그녀의 팔과 머리에서도 붉은 물이 번지고 있었다.나는 정의 손을 잡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우리 앞의 흰색 아반떼에는 젊은 커플이 타고 있었는데 구급차가 그들을 실어가는 것을 보자 그것이 우리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보험회사 직원은 우리가 6중 추돌사고의 여섯 번째 차량이라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다섯 번째 차량까지는 피해가 꽤 크다고 그는 이야기했다.난 이것이 과연 행운일까 싶었지만 그의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수긍했다.
우리는 서해대교를 건너 원래 목적했던 해안으로 갔다.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이었고 우리는 지쳐있었지만 이대로 다시 서울로 돌아갈 기분은 나지 않았다.지금이야말로 기분의 전환이 필요한 때라고 나는 생각했고 그것은 정도 마찬가지라고 했다.우리는 한쪽 눈이 먼 자동차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그악스럽게 내려꽂히던 빗줄기는 기세가 점점 약해져서 우리가 해변에 도착할 즈음 완전히 그쳤다.
데이트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비온 후의 해변을 휩쓰는 바람은 생각했던 것보다 매서웠고 내 외투는 너무 얇았다.사위는 온통 캄캄해서 바다와 하늘이 구별되지 않았다.나지막이 철썩이는 파도 소리로만 바다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별은 한 개도 보이지 않았다.우리는 오 분도 되지 않아 해변 산책을 포기하고 음식점이 모여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정이 미리 예약했다는,바다를 향해 나 있는 테라스와 천체망원경이 있는 해산물레스토랑은 상중(喪中)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임시휴업 팻말을 걸고 있었다.우리는 닫힌 문 앞에서 허탈하게 마주보며 웃었고,추위와 허기에 지친 나머지 더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문이 열린 가장 가까운 횟집으로 들어가 주문을 했다.가격에 비해 질이 낮은 광어회 접시를 앞에 두고 정은 건배를 청했다.내가 잔을 들자 그가 말했다.“십 년 동안 고마웠어.”그는 잔을 부딪힌 후 말을 이었다.“앞으로 올 십 년도 잘 부탁해.”나는 웃었다.그의 익숙한 얼굴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보니 늙었네.”
“너도.”
우리는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과,우리가 머물렀던 공간들을 떠올렸다.그것은 이미 아득한 기억이지만 우리의 좌표가 옛날 그 마법의 시간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원시적인 암흑 속에서 희미한 빛을 내며 우주의 끝을 향해 촘촘하게 뻗어나간 거대한 거미줄을 떠올렸다.그 줄엔 수많은 존재들이 얽혀있었고 나와 나의 세계는 그 안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그에게 전하려 했던 오래된 단어를 입 속에서 굴려보았다.아직도 채 마모되지 않은 단어의 날카로운 감촉에 마음이 아렸다.정의 말대로 나는 아직 자라지 않은 모양이라고,허허로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품고 있던 단어를 다시 가슴 한 켠의 상자에 넣었고,뚜껑을 닫기 전 마지막 인사를 고하듯 조용히 발음해 보았다.
안녕.

대리기사가 모는 차의 뒷좌석에서 정은 금세 잠이 들었다.나는 어깨를 눌러오는 정의 무게를 느끼며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구름 뒤에서 시시각각 멀어져가는 혜성을 생각했다.만이천년이란,우리의 자손과 자손과 자손,그리고 또 그 자손들이 몇 번이나 이어져 내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세월일까.그렇게 생각하니 그 운석의 여정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다.감은 눈 속에서 나는 무한을 가로지르는 기나긴 청록색 빛을 보았다.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곳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나는 멀어지는 빛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안녕.잘 가요.
그리고,다시 만나요.
떠나버린 혜성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은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그러니까 슬퍼하지 말자고 나는 생각한다.멀어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그것은 다시 내게로 올 거라고.
혜성의 꼬리가 점점 가늘어졌고 이윽고 시야는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그렇게 나는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